인간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외침
인간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외침
  • 황선주 기자
  • 승인 2019.01.07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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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인간에게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가…

최근 여주시 홍문동 일대에 독극물 추정에 의한 고양이 떼죽음 사건은 갈수록 심해지는 황금만능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로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바라는 필자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동안 극단적 동물 학대사례는 수없이 많았고 단순히 소음과 냄새를 이유로 학대하는 일부 사람들과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의 갈등은 여전하다.


버려진 집고양이들이 길고양이가 되어 주택가와 상가 주변의 길거리에 배회하고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로 생명을 연명해 가며 두려움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으로 동물 학대는 계속되고 있으며 독극물로 살해당하고, 폭력과 학대에 눈을 잃고 처참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동물들을 보고 있으면 일부 삐뚤어진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함에 같은 인간으로서 자괴감이 든다. 누가 동물의 생명을 죽일 권한을 인간에게 주었는가?


자연은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어우르고 유기적으로 공존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곳이 자연이다. 일부 사람들은 동물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학대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편함이나 불이익을 주면 거리낌 없이 공격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누가 동물의 생사여탈권을 인간에게 주었는지 묻고싶다.


각 지자체가 고양이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펴고 있는 ‘길고양이 TNR 사업'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동물복지 정책들이 발표되고 이는 곧 동물학대 방지에 대한 필요성을 한국 사회도 충분히 공감하고 공유한다는 증거다.


맹자 ‘공손추 上’을 보면 사단(四端, 네 가지 단서) 중 측은지심에 대해 말한 구절이 있다.
무측은지심(無惻隱之心)이면 비인야(非人也)라는 구절로‘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맹자는 “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나며 이는 측은지심으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고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점점 측은지심을 잃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도 묵인하는 사회 속에서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동물을 학대하는 행동을 범죄로 인식하고 학대를 마땅히 중지해야 함은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바로 인간에게까지 해를 입힐 수 있다는 데 이유가 있다. 19세기 말 독일의 연쇄살인범 피터쿠르텐은 동물을 죽이는 것을 일삼은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연쇄 살인마가 살인 전에 동물을 대상으로 살인 연습을 했던 것처럼 동물을 학대했던 사람의 잔혹성이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어 우리는 학대나 폭력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폭력’은 반복되고 ‘학대’는 습관이 될 것이다.
필자는 기자가 되기 전 학대전담경찰관(SPO, APO)을 준비한 적이 있다.


노인과 청소년 및 아동학대로 인한 문제의 심각성과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아동학대를 예방하고 힘없는 약자의 편에서 일하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폭력과 학대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경찰, 법조인, 언론인 등 각자의 위치에서 동물학대 예방을 위해 노력하고 강력한 법으로 강한 처벌이 있어야 학대와 폭력으로 인한 사건 사고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무관심은 항상 사건 사고를 낳는다. 반대로 작은 관심과 노력은 사건 사고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2019년 기해년 새해에는 폭력이나 학대를 방조하는 무관심하고 잔혹한 사회가 아니라‘무측은지심(無惻隱之心)’이면 ‘비인야(非人也)’라는 구절처럼 온정 있는 사회, 더불어 사는 세상, 평온한 지역사회가 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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