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역사적 의미 성찰 기념행사 통한 미래 도약·화합의 장 본격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 성찰 기념행사 통한 미래 도약·화합의 장 본격화
  • 황선주 기자
  • 승인 2019.02.25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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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주  기자)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다채로운 행사 준비에 분주하다.
오는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행사가 다음 달 1일(금)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양평군민회관에서 광복회원, 기관단체장, 군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펼쳐질 예정이다. 이 날은 독립유공자 소개 및 포상을 시작을 해, 기념사, 기념공연, 청소년이 바라본 3.1운동 등의 순서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어 오전 10시 30분부터 11시 20분까지 양평군민회관을 시작으로 양평군청, 물맑은시장쉼터까지 만세운동 재현(길놀이) 시가행진을 시작한다.특히 물맑은시장쉼터에서는 1천여명의 만세운동 참여자가 91인 독립운동가 사진을 설치하는 퍼포먼스, 태극기 단심대 놀이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진다.


이 날 행사에서는 점심시간인 12시 30분부터 약 60여분간 26여명이 참여하는 오찬 및 환담, 위문품 지급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독립유공자 유족 리셉션도 함께 마련될 예정이다.


양평군은 지난 1월부터 오는 4월까지 ‘양평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행사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성찰하고 기념행사를 통해 미래를 위한 도약과 화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양평군과, 대한광복회 양평군지회,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로 이어지는 3·1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행사 준비 상황을 최종 점검했다.


군 관계자는 "국권 회복에 헌신하며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였던 순국선열의 위업과 애국정신을 기리기위해 역사를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히며 “100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했으며, 전 가정 전 직장에 태극기 달기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양평군민과 함께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행사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3·1운동은 전 민족이 폭압적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여 일어나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약 2개월에 걸쳐 전국 방방곢곡과 국외동포사회로까지 퍼져나간 일제강점기 최대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 3·1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기초를 이루는 계기가 됐다.

일제강점기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의 후손, ‘변도상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만나다

▲ 독립운동가의 후손, 변도상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장.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회장 변도상)는 지난 23일 양평문화원에서 양평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3·1혁명으로 하나 된 양평의 근대’라는 주제의 포럼을 성황리에 마쳤다.
변도상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양평군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한 데에 대해 “마침 100주년 행사로 순국선열의 독립운동과 양평이 가진 역사자원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면서 “ 3·1만세운동은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 양평지역에서 2만 1천여명이 3·1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양서면, 양근면, 강상·강하면의 연합시위로 이어져 용문, 단월, 청운면은 물론이고 지평,개군, 양동면까지 전 지역민들이 함께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임원 (두번째줄 좌측 세번째, 변도상 3.1운동기념사업회장의 조부이신 변준호 독립운동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임원 (두번째줄 좌측 세번째, 변도상 3.1운동기념사업회장의 조부이신 변준호 독립운동가).

‘양평3·1운동기념사업회’의 설립 취지는
양평3·1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17년 3월 양평3·1운동기념사업의 필요성을 논의하다 추진되었다. 지난 2017년 7월 설립추진으르 위한 회원 모집을 시작으로 해 당해 말인 12월 21일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현재 양평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이 외에도 지난 2016년 12월, 양평지역에 광복회가 설립됐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지역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뜻을 기리자는 데 한 마음을 모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올해는 ‘양평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그 의미가 깊다. 지금 전국에서는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난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양평은 특히 경기도에서 세 번째 안에 들던 지역이었다. 양평에서 3·1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해서 사업회 결정을 추진하게 됐다.

‘3·1혁명으로 하나 된 양평의 근대’라는 주제의 포럼은 무엇인가
지난 23일 양평문화원에서 개최된‘3·1혁명으로 하나 된 양평의 근대’포럼은  윤경로 전 한성대학교 총장이 ‘100주년을 맞는 3.1혁명의 역사성과 현재성’에 대한 주제와 이복재 연구위원의 ‘양평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 및 인물’에 대한 설명에 이어 박한용 역사평론가의 ‘3.1독립운동과 양평의 3.1독립운동의 시대 의식’을 청취하는 자리였다. 이 날은 특히 청중과 주제 발표자와 대화의 시간을 통해서‘3.1운동과 3.1혁명에 대한 만세운동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고민해 보는 뜻깊은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됐다.

1919년 양평군의 만세운동은 어느 지역에서 행해졌나
양평군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양평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 시위를 시작으로 해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3월 24일 갈산면 장날 시위와 면사무소 시위가 있었다. 이어 같은 달 29일에는 강상면 교평리 시위, 30일은 용문면 광탄리 시위로 이어졌다.
양서면은 4월의 첫날과 양일간 시위를 시작했으며, 4월 3일은양서면, 고읍,강상,강하면 등과 함께 서편과 동편의 연합시위가 있었다. 이어 4월 7일에는 양동 시위, 4월 11일에는 곡수장터 시위를 끝으로 초오 25회에 걸쳐 만세운동을 펼쳤다.5만 9천명의 군민 중 2만 1천명이 참여했으며 특히 연합시위로는 4천여명에 이르렀으며 검거 인원만 해도 82명에 달했다.

우리 지역에서의 만세시위 과정과 양평지역의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인 운동가들을 알고싶다.

서종면
3월 10일 서종면에는 문호리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양평지역의 최초  3·1만세운동 시위가 이뤄졌던 곳이다.

양서면
4월 1일은 양서면 도곡리 일대에서 2,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 날 시위에는 전날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이 참가해 2,000여명의 시위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분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인 4월 2일은 여운형의 친척인 여운긍, 여광현 등이 주도하는 가운데 1,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강하면
3월 31일 강하면에서 진행된 3·1운동은 한말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을 전개한 68세의 최대현이 주도했다.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강상면
3월 29일 교평 나루터에서 진행된 만세시위는 양근리 장터에 가기위해 모인 준중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나루터에서 누군가“조선이 독립은 세계 각국에서 이미 승인했다”고 말하자 신석영이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약 100여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나루터는 시위장으로 바뀌었다.

갈산면
3월 24일 갈산면 장날에 진행된 만세시위는 연희전문대학교 서기 이진규가 양평으로 오면서 시작됐다. 이진규는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족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고 연설하면서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여기에 곽영준, 한창호, 김경석, 서상석, 김석봉, 한봉철 등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를 이끌어 1,000여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했다. 그러자 헌병들이 출동해 이진규와 곽영준을 체포·구금했다. 이에 군중들이 갈산면 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로 쳐들어가 서류 장부를 폐기하기도 했다. 한 편 이와는 별도로 갈산면 공흥리 주민 이용준은 4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양근리에서‘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갈산면사무소로 쳐들어가 면장, 면서기를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다.

고읍면
4월 3일 고읍면에소는 고읍, 강상,강하,양서 4개 면민4,000여명이 운집한 대규모 연합 시위가 일어났다. 강하면 시내를 주도했던 최대현,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이 다시 참가해 군중들을 이끌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시위군중들이 양평읍내를 향해 행진하던 중 일본병들과 마주쳐 최대현은 체포되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되었다.

  용문면
3월 30일 광탄리에서 진행돤 만세시위는 마룡리의 조용호, 오촌면의 김윤구, 신순근 등의 주도로 시작됐다. 조용호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지금 우이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응당 두가지로 갈라져야하지 않겠느냐”고 외치자 군중들이 만세 행진에 나섰다. 시위 주도자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제면
4월 30일 지제면 곡수리에서 3,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시위가 치열한 양상으로 치닫게되면서 일본 경찰이 발포한 포에 6명이 피살되었다.
4월 11일에도 지제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시위는 당시 여주군에 속해있던 개군면의 김영규, 이철영, 이호승, 곽수영 등에 의해 진행됐다. 김영규는 시위군중이 행진을 하던 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해 이호승 마저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양동면
4월 7일 석곡리 일대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동지를 규합해 격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전석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청운면
3월 23일 용두리 장날을 기해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외치며 행진했다. 이날 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이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를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조선독립기’라고 쓴 깃발을 만들었다. 이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했다. 시위가 계속되자 일본 헌병이 출동해 시위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양평3.1운동기념사업회’의 앞으로 행사 계획은
양평3.1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해 9월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초청해 양평3.1운동 100주년 마중사업 초청강연회를 시작으로 10월 장원석 몽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박준현 국가보훈처 연구원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양평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월 1일 오전 9시 30분 3·1절 기념식(군민회관)과 94인이 펼치는 만장퍼레이드, 만세퍼포먼스, 기념물 설치미술을 개최하고 오는 3월 31일에는 햇불을 들고 강을 건너오는 도강 행사와 함께 만세터까지 걸어오는 행사를 개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오는 3월 31일 ‘양평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최종 마무리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민간자체사업인 ‘3·1만세운동 읍면 재현행사는 오는 4월 11일 지평면까지 각 읍면 자체참여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당부하고싶은 것은 100주년 행사가 마무리되어도 양평지역에서 우리 순국선열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해주었으면 한다.

양평 지역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들었다. 조부모님이신 변준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셨던 조부모님께서는 의병운동이 활발했던 양평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며 반일의식이 있었던 분이시다. 미국으로 떠나 흥사단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해 식민지 운동가답게 해방을 목표로 다양한 사조를 수용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해방 이후 변준호 조부모님께서는 미군정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자로 나서기도 했던 이유는 미군정의 정책이 통일 정부의 실현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분단이 가시화되던 시절에 일생의 대부분을 타지에서 보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부모님께서는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전파하고 진보적인 한인들의 활동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이념이나 강대국들의 힘에 경도되지 않고,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경계며 오직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셨다.
이로 인해 지난 1997년 8월 15일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의한 훈장을 받으셨으며, 지난 1998년 6월 1일에는 애국정신과 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으신 분이시다.
김창만의 ‘신만일보’의 추모시를 보면 저희 조부모님께서 한인사회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방면으로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1997년 미주지역 한인의 독립운동 포상인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으며 그가 진정으로 원하셨던 ‘조국에 대한 미래의 평화’였다고 한다.
특히 변준호 조부모님께서는 미군정이 남한에서 조선애국자들의활동을 탄압하고, 조국이 분단되어 가는 현실을 보고
 ‘통일에 대한 기대, 전쟁만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간곡한 바람을 글로 남기시고 결국 노환으로 1966년 2월 20일 71세에 돌아가셨다.
 황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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